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김대중 대통령 명언 모음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상식인인 것이며, 

위대한 생각은 완전한 상식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황금을 얻고자 싸운 사람은 황금에 먹히지 않도록, 

권력에 집착한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범인 잡는 데 종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범인을 닮아서 사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공산당과 싸운다면서 

공산당의 수법을 닮아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할 일이다.




진정한 정치가 할 일은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서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하던 자와 빼앗던 자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해서 대열에 참여케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치는 예술이 된다.




민주 국가에 있어서 언론과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존폐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어떠한 독재나 부패도 언론이 살아 있는 한 영속될 수 없고, 

어떠한 부조리나 인권 침해도 법관이 건재하는 한 묵과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기능이 건재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이 두 개의 기능에 대한 감시와 격려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언론과 법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권리와 책임의 의식에 무장되어 자기와 그 사회의 운명의 주인이고자 하는 

결의에 넘친 그리고 필요하면 희생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시민계급의 존재다.

이러한 시민계급의 존재야말로 민주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공산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의 민주에 대한 욕구는 강력하며 이를 운영할 만한 민도도 충분하다.

다만 자유를 위해서 몸을 바치려는 용기와 의지가 부족하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by the people"이다.

국민의 충분히 자유로운 참여 없이는 아무리 국민의 이익을 도모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인권 회복과 민주 회복은 어디까지나 

우리 국민의 각성과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처지에 있을 때만 우리는 해외의 벗들의 지원을 얻을 자격이 있다.




우리가 이 유사 이래의 최대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조국 분단과 공산 위협을 극복하고 

진정한 안정과 경제발전과 통일을 이룩하려면, 운명의 주체세력인 민중이 

주인으로 대접받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지배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민중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능력의 한계를 압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방법도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참여의 길 이상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6대 국회의원이 되고서 신문에 "우리는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라고 말해서 자주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과 같이 양발을 원칙 위에 확고하게 딛고, 

상인과 같이 양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두 가지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해야 합니다.




단단히 강조할 것은 교회가 사회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개혁에 참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적·도덕적 지도의 범주이지 교회 자체가 정치나 사회의 

이해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 안 되며 또한 절대 금물입니다.

교회의 정치활동이나 특정 정치세력과의 결탁은 

교회의 타락과 파멸을 의미하며 사회를 위해서도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애국의 실체는 백성이다.

백성이 애국하고, 백성을 위해 애국해야 한다.

소수자가 애국을 농단하거나 소수자를 위한 애국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이 똑똑하고 강해져야 한다.




우리가 나아갈 도덕적 방향은 우리의 정치·경제·사회의 방향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찰과 혼란과 분규를 면하고 건전하고 힘찬 도덕 사회를 이루며, 

각 개인도 보람 있는 도덕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치 없이 도덕 하나만 고집해서 향상 발전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민주주의요, 사회정의요, 경제발전이요, 국가안전이요, 조국의 통일입니다.

우리의 사회도덕이 이러한 국가 목적과 일치할 때 

개인도 의욕과 보람과 희망을 품고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인물이 적어지고, 전문가의 지식이 하등의 위력을 나타내지 못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람들이 종합적인 인간 형성, 

즉 전인적 발전을 등한히 한데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세를 갖추는 데 언제나 사물을 근원적인 것과 

표면적인 것을 합쳐서 파악하고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면을 아울러 보아야 합니다.

강의 표면과 저류를 아울러 생각하고, 본류와 지류를 같이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강의 표면과 자기가 전문으로 하는 

어느 지류에만 집착해서 그것을 강 전체로 판단한다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전체와 부분, 근원과 현상을 같이 보고 나아가서 경중, 완급을 종합 판단해야 합니다.

항시 자기 인격을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하는 동시에 독서에서도 종합적인 지식 형성에 힘써야 합니다.

경제학자로 말하면 경제 이외에 정치, 사회, 국민 심리, 역사 등에 대한 

지식의 도움 없이 바른 경제 정책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바람직한 인물은 첫째, 투철한 역사의식과 명민한 통찰력으로 나라의 갈 길을 정립하고 

둘째, 민의를 하늘의 뜻으로 받들 뿐 아니라 국민의 모든 분야에의 

참여를 적극 조장해서 국민이 자기 힘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도록 하며 

셋째, 도량과 자제와 끈기로써 대립한 의견과 이해를 조정하며 

넷째, 근면·성실·헌신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며 

다섯째,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의욕과 참여의식을 고취하는 지도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공산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성공적으로 지켜내려면, 인물을 발굴하고 인물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조선조의 사색당쟁과 같이 반대파에게는 모조리 수치스러운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불행한 풍토를 단호히 탈피하는 민족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사회가 인정해 줄 만큼 성장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그러나 이를 망치는 데는 순간이면 족하다.

많은 사람들, 국민의 존경이나 기대를 받던 사람들이 압력이나 

유혹에 못 이겨 자신을 망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우리는 가슴 아파했는가!

그리고 인간의 신념이니 인격이니 하는 것에 얼마나 자주 회의했던가!

그보다도 그러한 변절의 인사들이 아직도 국민들이 자기를 옛날대로 

인정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지도자연하고 설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불쌍하고 민망하던가!




인격의 바탕 위에 서지 않은 학문은 천박한 지적 기술에 불과하다.

항시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선을 행하는 데 주저하지 말고, 

균형 있는 판단을 찾으며, 남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충효(忠孝)는 "정부는 정부다워야 하고 국민도 국민다워야 한다" 

"부모도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도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외적으로는 독립과 공존을 양립시킬 수 있고, 

대내적으로는 통합과 다양성을 병행시킬 수 있다.

민주주의 없는 민족주의는 쇼비니즘과 국민 억압의 도구가 되기 쉽다.




나는 언제나 우리 국민을 신뢰하고 그 가능성을 믿어왔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도덕 상황은 심각하여 우려할 만하다고 믿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떠한 부강한 나라도 로마제국이나 역대의 중국의 제국들에서 본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반드시 망하며 반면에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그 나라들의 

초창기 같은 도덕적으로 강하면 반드시 융성의 길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그 겨레를 사랑한 사람은 마땅히 찬양받고 존경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들은 그로 인해서 박해를 받고 누명을 쓴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보상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지 말고 

자기 삶의 존재 양식 그 자체에서 만족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바른 보답을 준다는 사실에서 위로받아야 한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만들었다. 석굴암은 김대성이 만들었으며, 

경복궁은 대원군이 건축했다"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잘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허구다.

진실한 건설자는 그들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석수, 목수, 화공 등 백성의 무리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정확히 깨달을 때 이름 없는 백성들에 대한 외경심과 

역사의 참된 주인에 대한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된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자유는 지키는 자만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자유는 방종도 아니고 모든 원리에 대한 거부도 아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전인적 완성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제약과 조건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비록 고난 속에 살더라도 자기 양심에 충실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줄 때 그는 더욱 행복하다.




고난의 시절에 행복한 날을 기다리며 참아나가라는 것은 잘못이다.

행복한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오더라도 그간은 불행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시절 그 자체를 행복한 날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표를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 두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으려면 먼저 나부터 남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꼭 명심할 것은 아무리 친구를 아낀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이나 행동이 너의 판단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대로 넘길 수 없을 때는 결코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옳지 않은데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그런 사람은 자주성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며 

결코 장래 자기 앞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특별히 큰 차별이 없는 한 되도록 친구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많은 벗과 

원만히 살아 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 김대중이 아들 홍걸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면 10년은 한눈팔지 말고, 꾸준히 그 길을 가라.

나의 경험으로는 10년만 자기 가는 길에 전심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의 터가 잡힌다.

그리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자기 분야에서 정상까지 오르면 

정상에서는 다음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진출할 수 있다.

경제인으로 정상에 가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 정치인으로도, 

사회사업가로도, 교육·문화 사업의 경영자로도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제일 불행한 것은 정상에 오르기 전에 중도에서 경솔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신앙생활이건, 공부건, 선행이건, 모두가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그러나 절대 쉬지 말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좌절이 있고, 의혹이 있고, 

권태가 있으며, 또 이를 중단할 구실도 발견된다.

그런데 자기를 잘 설득하고 새로운 자각으로 새출발하도록 유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과의 토론과 

설득과 결심의 일생이며 새출발을 거듭하는 일생이다.




인생의 목표를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값있게 사느냐에 두어야 한다.

앞에 말한 정상 도달은 때에 따라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값있게 살려고 애쓴 일생이었다면 비록 운이 없어서 

그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일생은 결코 실패나 불행도 아니다.

값있고 행복한 일생이었다고 할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우리는 코스를 정하기 전에 미리 신중한 고려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정하면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가는 도중에 자기 코스가 가장 힘들어 보이고 남의 길은 쉬워 보여 

변경의 유혹이 집요하지만 이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일단 정상을 정복하면 꼭대기에서는 어느 길로도 내려갈 수 있는 선택권이 생깁니다.

경제인으로 정상을 정복한 사람은 정치인으로도, 교육 사업가로도, 

문화의 육성가로도, 외교관으로도 무엇으로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길을 성취하면 다른 길도 구체적인 방법이나 현상이 다를 뿐, 

그 원리나 이를 다루는 원칙이 공통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한 종합적 인격을 갖춘 이후의 어느 전문가는 

만 가지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나의 경험을 통한 생각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패자의 운명 속에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운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 속에 살다 죽은 사람만이 그 진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완성합니다.

진리란 우리의 양심이 받아들이는 인간의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이 나고 매일 새로이 전진해야 한다.

우리의 정복의 상대는 자기다.

안주하려는 자기, 도피하려는 자기, 교만해지려는 자기, 

하나의 성취에 도취하려는 자기와 싸워서 이를 정복해야 한다.




책을 읽으면 꼭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있어야만 책 읽은 가치가 있다.

책은 죽은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기 위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역사를 읽을 때 통감하는 것은 민족이나 개인이나 

외부로부터 도전받지 않고 발전한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전받아도 자주적으로 효과 있게 

응전하지 않는 민족과 개인에게는 위대한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결의와 노력과 희생의 준비가 되고 

이를 실천한 자에게만 역사는 축복의 미소를 보냅니다.

자기 운명의 지배를 스스로 거부하면 우리는 또다시 좌절과 패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은 어디까지나 

우리 국민의 각성과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입장에 있을 때만 우리는 해외의 벗들의 지원을 얻을 자격이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적 제도, 즉 언론 자유, 강력한 야당, 여론에 민감한 행정부와 

정상적인 국회, 정의로운 사법부가 있는 상황에서 성장하는 경제는 

중산층의 육성과 사회 복지에 공헌해서 민주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강화한다.




정치는 이념을 실천하는 행동의 과학이기 때문에 

정치인은 그 이념보다 그의 업적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역사상 가장 큰 격변의 세기이고 그중에서 한국은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는 나라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처한 문화적 위험의 하나는 식민지 문화로 되는 위험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국수주의적 문화로 되는 위험이다.

우리가 건설할 문화는 민족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겸비한 문화다.




가난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가난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아무리 물질적 성장이 있더라도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이 양심과 도덕에 어긋난 일을 하거나 비겁한 처신을 하려 할 때는 

이별을 각오하고라도 이를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런 아내는 남편의 존경을 받게 된다.




남편을 위한다는 심정으로 가정사를 상의 안 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남편과 상의해서 가정에 관심을 두게 해야 한다.

자식들이 커감에 따라 그들과 상의하는 범위도 넓혀가야 한다.

정기적인 가족회의를 갖는 것은 가족의 화목과 일체감을 위해서 아주 필요하다.




가정을 가지면 부부간에는 서로 존경함을 사랑 못지않게 중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장점을 발견하려고 힘쓰고 이를 격려해 주도록 해라.

그뿐 아니라 집안일이건 밖의 일이건 부부는 서로 가장 가깝고 

중요한 협의 대상자가 되어야 하며 공동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고난에 처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고난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사랑의 역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고난은, 

그를 성장하게 하는 시련은 되어도 결코 불행의 사자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사에는 반드시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양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대처 여하에 따라 좋은 일이 재앙이 되고 나쁜 일이 복을 가져온다.

부자의 아들이 돈 때문에 타락하고 가난한 집 아들이 그 때문에 분발하듯이.




성인이란 가장 많이 깨달은 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깨달은 것을, 

자기를 희생시키면서도 민중에게,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는 그들에게 전하고 

헌신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인이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들에게서 배울 것은 

이웃과 겨레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우리는 겨레와 이웃에의 사랑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자기의 인생을 성인의 길과 일치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사회이고 인간이고 간에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도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하나의 일을 성취하고 다음 응전까지 새로운 응전을 위한 

잠시의 휴식은 있어도 결코 영원한 휴전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무슨 계획을 세웠어도 흔히 중단됩니다.

우리는 이런 데 실망하고 그 계획을 포기해 버리기 쉽습니다.

나도 과거에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습니다.

(중략) 생각을 바꿔서 무슨 계획을 세웠다가 중단되어도 개의치 않고 

다시 계속하고 그다음 중단되면 다시 계속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것, 어학 공부하는 것, 매일 조석으로 체조하는 것 등에 

새로운 습관을 들여서 꾸준히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되풀이의 끈기를 체득하려 합니다.




자기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남도 똑같이 합리적일 것으로 믿으며, 

자기가 양심적인 사람은 남도 다 그런 것으로 알고 처신한다.

우리의 처세상 실패의 큰 원인의 하나가 여기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격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다.

인류의 숭배와 추종을 받은 사람은 지식의 정상에 오른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한 인격의 성자들이었으며, 

같은 학우들 가운데서도 남의 추종을 받고 성공하는 사람은 

공부 잘한 사람보다 덕망 있는 사람이란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자기의 직업이나 직책을 택할 때 일시적 수입이나 지위보다는 

참으로 자기가 인생의 보람을 그 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한 결정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사회에의 공헌과 자기 능력의 발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긴 안목으로 보면 그러한 선택은 

결국 경제적 수입과 지위의 향상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쓸모없는 사람은 찾아오지만 좋은 벗은 내가 찾아가서 사귀어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온통 열고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를 아낌없이 그에게 주어야 한다.

온몸으로 받고 주어야 하며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결함이나 계략을 눈감아주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능히 보면서 온몸으로 대하여 주고받으라는 말이다.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




남이 나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 고통 속에서 불행하게 되느냐 

오히려 이를 발전의 계기로 삼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




이기심과 탐욕은 큰 죄악이다.

이기심은 자기를 우상화하고 탐욕은 탐욕의 대상을 우상화한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떠한 권위 있는 학설이나 진리도 나 자신의 지적 검증을 통해서만 이를 인정해야 한다.

연극, 음악, 문학 등을 감상할 때도 자기가 느낀 대로 이를 평가해야 한다.

설사 미숙하더라도 권위 있는 평자의 말을 자기 의견인 양 되뇌는 것보다 열 배는 좋다.




학문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 된다.

존경은 해도 비판의 눈은 견지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내 자신의 비판의 그물에서 여과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미숙하고 과오를 범할 경우가 있더라고 

내가 나로서 사는 유일한 지적 생활의 길이기 때문이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성장 없는 삶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청년이라 하더라도 인생의 종말을 가는 노인이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청춘을 낭비하다 늘그막에 후회하는지….

이는 나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배우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향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의문과 미결의 과제를 안고 산다.

의문 사항을 하나하나 적어놓고 꾸준한 인내와 노력으로 해답을 얻어가야 한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난관이나 불운에 부딪힐 수가 있다.

그러한 때는 결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그러한 시련의 태풍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다만 다시 때가 왔을 때를 위하여 노력과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인생(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같은 동물 중 다른 것들을 볼 때 

그것이 아주 큰 축복이며 멋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다른 동물 아닌 사람 동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고통의 시련과 대결해서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 보겠다는 의욕을 갖기에 족하지 않을까?




사람은 가난하게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부유하게 되지도 말 일이다.

우리는 가난해도 부유해도 다 같이 돈의 노예가 된다.

알맞게 갖고 자유인이 될 일이다.




우리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일과 중요한 것같이 보이는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후일에 되돌아보면 하찮은 일에 중요하다고 매달려 얼마나 많은 인생을 낭비했던가!




경쟁에는 형제적 경쟁과 적대적 경쟁이 있다.

전자는 경쟁자와 협력하며 남을 살리면서 또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경쟁한다.

후자는 고립해서 투쟁해서 남을 파멸시키면서 또는 남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경쟁한다.

전자는 남을 다 같이 성장시키고 후자는 자기와 남을 다 같이 좌절시킨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가까이 갈 수는 있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려면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알기 위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도 이해도 없는 가운데 곡해와 무지가 쌓여 있으면 용서도 사랑도 있기 어렵습니다.

물론 무조건 용서와 사랑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가능한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악을 내리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악은 이기적으로 삐뚤어진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과 

이 우주의 미완성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과의 두 가지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악은 당장의 시정을 위해서 싸워야 하고, 

어떤 악은 장래에 제거를 기대하면서 싸워야 하되 죽음과 같은 악은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죄의식에서 출발했으며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가 개인의 죄악에는 현미경을 대고 

찾을 정도로 엄격하면서, 사회 구조적인 죄악에는 거의 외면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서 개인의 살인은 단죄하나, 

히틀러 같은 자의 대량 학살은 묵인하거나 그런 정치를 지지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이라 하면서 노예제도를 지지했고, 식민주의를 지지했다.

도둑질하지 말라 하면서 기업의 부당이득이나 노동자에 대한 불공정한 착취는 묵인한다.

그러한 종교인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면 사회적 악은 자연히 없어진다"라고.

모두가 크리스천이 되는 것도 까마득한 일이지만 설사 된다고 해도 그 사회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기독교 일색의 사회인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죄악이 내부에서, 밖에서 저질러졌는가?




왜 교회에 가야 하고 교회가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공동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서로 친교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의식과 사랑을 오늘의 기성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몸은 교회의 집회에 나가서 어울리지만, 마음은 여전히 외롭다.

오늘날 신흥종교가 성행하고 신자들이 기성교회에서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날로 심해진 것은 여기에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진정한 예수의 종교가 되려면 개인의 죄뿐 아니라 사회적 죄악에 대해서도 싸워야 한다.

그래야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묶인 자에게 해방을 알리시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누가복음 1:18)하신 뜻에 합당한 것이다.




신학저 볼트만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적 삶의 성격은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신앙의 태도가 규정한다"라고 했다.

근자 한국 교회 일부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느니 방언을 했다느니 하면서 

그러한 망아((忘我)적 상태야말로 참된 기독교인이 된 증거같이 떠드는 경향에 그 말은 좋은 경고가 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그와 같은 성령 소동을 경고한 바 있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은 암흑의 권세와 싸워야 하고 소금은 부패의 힘과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시련과 고난의 생활을 의미한다.




양심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유일한 길이다.

양심에 따라 사는 생만이 인생에서 성공의 진실한 가치를 보장하며, 

설사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

양심에 입각한 삶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건 실패하건 하느님의 축복이 따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세상이 악한 것 같아도 결코 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본인의 의식, 

무의식 간에 진리와 정의에의 갈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역사를 보면 많은 창조적 선구자가 고독하고 절망적인 것같이 보이는 투쟁을 전개한다.

그는 자기의 당대에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민심이란 변덕이 많고 속기 쉽고, 이기적이며, 겁 많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은 결코 그들의 안에서 울려오는 진리와 정의에의 

갈망의 소리를 오래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선구자의 신념에 찬 노력과 희생, 백성들의 진리와 정의에의 궁극적 추종, 

이것이 이 세상을 망하지 않게 지탱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위선자이다.

우리가 선을 행한 것은 그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거나 감정을 즐거워해서 행하는 경우는 적다.

이를 무릅쓰고 이성과 의지로써 행하는 것이자.




역사는 항시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대는 어디에 서 있으며,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웠으며, 

현재 무엇에 공헌하고 있으며, 후손을 위해서 무엇을 남기려느냐고.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 책 "옥중서신 1권(김대중이 이희호에게)"에서 발췌 -